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 인정전 (문단 편집) == 구조 == * 2단으로 쌓은 넓은 월대 위에 높직한 [[주춧돌]]을 놓고 그 위에 둥근 [[기둥]]을 세웠다. 정면 5칸, 측면 4칸의 2층 전각[* 보통 전통건축에서 2층보다는 '중층(重層)'이라고 많이 표현한다.]으로, [[지붕]]은 팔작지붕, [[처마]]는 겹처마이다. [[공포(동음이의어)#s-2|공포]]는 다포 양식이며 외부의 쇠서[* 소의 혀란 뜻으로, 한식 목구조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, 끝을 소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를 말한다.]는 3중 앙서[* 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 오른 쇠서받침.]에 수서[* 끝이 아래로 삐죽하게 처진 쇠서받침.] 하나를 운궁[* 살미(첨차와 직교하여 보방향으로 걸리는 공포부재를 통칭하여 부르는 명칭) 내부에 구름 모양으로 겹쳐진 부분.]으로 처리했으며, 첨차[* 공포의 부재.]는 교두형이고, 보 머리는 3분두이다. 기둥 머리의 안초공[* 창방과 직교하여 기둥머리에서 빠져나와 평방과 주두 또는 주두와 도리까지 감싼 부재.]이 살미 밑을 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 [[창덕궁 인정문|인정문]]과 다른 수법이지만, 복잡한 초각 등과 함께 [[조선시대|조선 후기]]의 다포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.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2057226&cid=42840&categoryId=42848|출처]] * 18본의 평주로 된 외진주와 4본의 고주로 된 내진주가 세워져 있고, 정면 3칸과 측면 2칸이 중앙칸이며, 그 둘레는 퇴칸이다. 좌우로 동행각 36칸과 서행각 38칸이 딸려 있다. 내부는 통층으로 밖에서 볼 때는 2층이지만 안에는 구분없이 뚫려있다. *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창덕궁_인정전_보개천정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인정전 천장에 달린 봉황 조각[* [[http://www.heritage.go.kr/heri/cul/imgHeritage.do?ccimId=6400922&ccbaKdcd=11&ccbaAsno=02250000&ccbaCtcd=11|사진 출처 -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.]]] '''}}} || 실내 [[천장]] 가운데에는 금박을 입힌 [[봉황]] 두 마리가 걸려있다. 아무래도 [[제후|제후국]]의 [[궁|이궁]]으로 지은 것이다 보니 그런 듯하다. [[답도]]에도 봉황이 새겨져 있다. 반면 [[조선]]의 [[법궁]] [[경복궁 근정전|경복궁의 근정전]]은 답도에 봉황이 새겨져 있으나 천장엔 [[용]]이 걸려있으며 [[틀:대한제국 황궁|대한제국의 황궁]]인 [[덕수궁 중화전|경운궁(덕수궁) 중화전]]은 답도, 천정에 용을 새기고 걸었다. * 2층에는 문짝이 없으나 아래층에는 칸마다 문짝이 달려 있다. 그리고 정면 중앙 칸과 후면 중앙 칸에 하나씩 출입문을 두고 나머지 칸은 [[창문]]으로 삼았다. 《[[동궐도]]》 및 1902년에 [[일본인]]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한 [[사진]]을 보면 원래는 정면 중앙 칸 기준으로 좌, 우에 한 칸씩 출입문이 있었고, 가장자리 칸의 하단부도 원래는 머름이 아니라 [[창경궁 명정전]]처럼 [[벽돌]]로 마감했으나 [[대한제국]] 시기 이후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. 또한 문짝의 색도 원래는 붉은색이었으나 [[순종(대한제국)|순종황제]]의 [[이사|이어]][* 임금이 이사하는 것.] 이후 [[황제]]를 상징하는 황금색으로 칠했다. *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창덕궁 인정전(세키노 타다시).jpg|width=100%]]}}}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창덕궁 인정전(일제강점기)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1902년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한 인정전'''}}} || {{{#gold '''일제강점기 인정전 일곽'''}}} ||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인정전 어좌.png|width=100%]]}}} ||<#fff>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1980년대 인정전.pn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변형된 인정전 어좌'''}}} || {{{#gold '''1980년대 인정전'''}}} ||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복원 중 인정전.jpg|width=100%]]}}} ||<#fff>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인정전 어좌(현재)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1990년대 복원 중인 인정전 일대'''}}} || {{{#gold '''현재 인정전 어좌'''}}} || [[순종(대한제국)|순종황제]]의 [[이사|이어]] 이후 달라진 부분이 더 있다. 내부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[[천]]과 [[커튼]], [[전등]]이 달려있다. [[창문]]과 [[문]]도 창호지 대신 [[유리]]로 바뀌었다. 건물 내부 바닥도 [[전통]] [[벽돌|전돌]]이 아닌 [[일식|일본식]] [[마루]]가 깔렸다. 그리고 원래 인정전과 행각은 따로 있었는데, 원래의 행각을 철거하고 [[한국]], [[일본]], [[서양]]의 [[양식]]이 섞인 귀빈대기실 등을 지어 인정전과 [[복도]]를 바로 연결시켰다. [[경술국치]] 이후에는 변형이 더 심해졌다. 어좌와 일월오봉병이 사라지고 대신 작은 서양식 [[의자]]와 [[테이블]], 일본식 금박기법과 자수기법을 적용한 커다랗고 괴랄한 [[봉황]][[그림]]만 달랑 놓였다.[* 이 봉황금박자수는 현재 [[국립고궁박물관]]에서 보관 중이다.] 또한 앞마당의 박석도 걷혔고 그 자리에 [[잔디]]가 깔리으며 [[모란]]같은 [[꽃|화]][[나무|초]]가 심어졌다. 어좌는 1960년대 초에[* 1961년 국제지역사회개발회의를 창덕궁 인정전에서 개막했고 이때 사진을 보면 어좌는 보이지 않는데 [[:파일:2278.jpg|보기]], 3년 뒤 개봉한 영화인 〈세종대왕〉을 보면 어좌가 있다.[[https://movie.naver.com/movie/bi/mi/basic.naver?code=21603|보기]]] 인정전 주변의 외행각은 1991년 이후, 그리고 앞마당 박석은 1994년에 복원했다.[* 복원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인정전의 내부 의장, 전등과 커튼 일본식 나무마루 등은 복원하지 않았는데, 이는 일제강점기에 바뀐 모습도 함께 보여주기 위함인 듯하다.] *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인정전 용마루.pn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인정전 용마루의 이화문[* [[https://post.naver.com/viewer/image.nhn?src=https%3A%2F%2Fpost-phinf.pstatic.net%2FMjAxODAyMDlfNjcg%2FMDAxNTE4MTYyNTMxODI1._BvdYCLgQwdZdT981jv_j_aTzamemG8IhrXBKxV9VTkg.9mej3TOddHTz4F_UpR9C75Z-BxyuwOiJZb0-lbyMu-kg.JPEG%2F130402_st_psj_05.jpg|사진 출처.]]]'''}}} || 다른 [[궁궐]] [[건물]]과는 다르게, 용마루에 [[이화문|이화문(李花紋)]][* [[배(과일)|배꽃]]을 가리키는 이화(梨花)와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. [[이화학당]], [[이화여자고등학교]], [[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]], [[이화여자대학교]]의 이화는 배꽃(梨花)이다.]이 설치되어 있다.[* 이는 정문인 인정문도 마찬가지. 인정전에는 5개, 인정문에는 앞뒤로 3개, 총 6개가 박혀 있다.] 이화문은 대한제국 국장 및 황실의 문장으로 황실이 [[전주 이씨]]라 오얏꽃([[자두]]꽃)을 상징으로 삼았다. 다른 조선 궁궐에는 이런 장식이 없는데, 이렇게 특정 문장을 새겨넣는 것은 개화기 무렵, 서양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.[* 일본의 중세 건축물에 가면 [[가몬(일본)]]을 이렇게 새겨넣는 것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.] [[순종(대한제국)|순종]]이 이어했을 당시에 설치했다는 의견과 [[일제강점기]] 이후에 설치했다는 의견이 있다. 전자는 이미 구한말 궁에 유리창과 커튼, 카페트를 적용하는 등 다방면에서 외국식을 도입하고 있었던 것을 근거로 들 수 있고, 후자는 일본이 전통 양식 파괴를 위해 고의적으로 용마루에 박았다는 것이다. 대한제국 황실이 [[경술국치]] 이후 [[왕공족|이왕가]]로 격하되었음에도 이화문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계속 썼기 때문에 아주 근거없는 주장은 아니다. 다만, 이것이 와전되어 꽃 종류를 구분하지 못하고 [[사쿠라]]를 박았다는 낭설이 나돌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